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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내 인생의 팔 할은 성실이다”신안건설산업 우경선 회장 인생탐구 작성일 2011-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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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에게 사랑받는 기업 일궈낸 비결
“제품이 우수하지 않으면 고객은 우리를 찾지 않는다”고 말하는 우경선 회장. 1978년 신안주택개발주식회사를 인수해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는 끊임없이 달려왔다. 상당수의 건설회사들이 경기불황, 부실공사, 저조한 분양으로 쓰러져가는 속에서도 신안건설산업은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탄탄대로를 걸어왔다.
2010년 칠순을 맞이한 우경선 회장은 지금도 경영일선에서 회사의 발전을 주도하고 있다. 오랜 습관 덕분에 아무리 늦게 자도 매일 새벽 6시면 눈을 뜨는 그는 요즘 일어나면 한 시간가량 요가를 한다. 특별히 보약을 먹거나 운동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루 일과를 거뜬히 소화해내는 것을 보고 주변 사람들은 타고난 체력의 소유자라고 말한다. 그는 타고난 근본체질도 있지만 건강 또한 습관이라고 이야기한다. 규칙적인 생활과 부지런한 습관을 가지면 건강은 절로 따라온다는 것.
“생활이 규칙적이라는 것은 분위기에 휩쓸려 무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영자로서 직분을 다하기 위해서는 무리한 술자리나 흡연처럼 건강 사이클을 깨뜨리는 습관을 버릴 수밖에 없어요. 계획을 세우고 또 그것을 지켜가기 위해 부지런한 습관을 갖다 보니 건강도 자연히 따라오더군요.”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했던가. 그는 몸을 가꾸는 것 이상으로 배움에 대한 아쉬움도 많은 사람이다. 열여섯 살 때 부모를 잃은 그는 당시 아는 사람의 소개로 초등학교에서 일을 보며 공부하는 소사 일을 했다. 남들이 공부하는 시기에 일을 하며 지냈지만 꿈만은 잃지 않았다. 스무 살에 서울에 올라와 과일도매, 양복재단, 이발소 운영을 하게 되면서 그는 폭넓은 시야와 경험을 쌓아갔다. 1966년 결혼 후 새로운 이발소를 운영할 건물을 알아보던 중 직접 건물을 지어 가게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당시 건물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은 제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어요. 그전까지 건설은 전혀 모르는 분야였거든요. 처음 시작은 내 집을 짓는다는 차원이었지만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며 주택사업에 뛰어들면서 본격적으로 건설업에 눈을 뜨게 됐죠.”
이후 40여 년을 건설인으로 살아오는 동안 그는 신안건설산업을 중견 건설업체로 키워나갔다. 사업 규모가 커지면서 잠재되어 있던 배움에 대한 갈증은 다시금 일어났다. 더 큰 성장을 위해서는 자신부터 배우는 게 가장 급하고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1978년 건국대 행정대학원에 들어가 배움의 큰 기쁨을 맛본 그는 이후 연세대 경영대학원, 미국 UCLA, 전경련 국제경영원에서 최고경영자과정을 밟았다. 최고경영자과정에서 경영의 안목과 현실을 보는 눈을 넓힌 그는 건설업에 관한 지식을 더 쌓기 위해 중앙대 건설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과 고려대 언론대학원, 서울대 환경대학원 도시환경정책과정 등 여러 분야의 학문을 접하며 지식을 체계화해나갔다.
오직 한길, 건설을 위해 달려왔다
우경선 회장은 젊은 시절부터 다양한 직업을 경험하면서 인생의 큰 교훈을 얻었다. 실패가 있어야 그 자리에 성공을 채울 수 있다는 것이다.
“건설업에 종사하면서 비교적 수월하고 안전하다고 생각한 일에서 손해를 입기도 하고 사업하다가 중도에 포기한 적도 있었어요. 손해를 볼 때마다 실패라고 한다면 저는 정말 많은 실패를 한 사람이죠. 하지만 지금껏 한 번도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살아가는 과정의 하나일 뿐이라고 여기며 넘겼어요.”
사업이든 인생이든 부침이 있고 인내해야 할 시기가 있다. 실패했다고 주저앉기보다는 스스로를 냉철하게 판단해 다음 발을 내딛는 것이야말로 지금을 있게 한 근간이 되었다. 여러 번의 실패와 성공 끝에 그는 품질을 그 무엇보다 우선시한다는 사업의 첫째 원칙을 세웠다. 좋은 품질의 아파트를 남보다 싸게 분양하면 극심한 불경기라 해도 쉽게, 빨리 팔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아무리 세련된 광고와 브랜드 이미지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구매자들이 직접 봤을 때 만족스러워야 한다. 그런 이유에서 신안건설산업이 파주 인근지역에 지은 신안실크밸리는 유명 대기업에서 내놓은 아파트와 경쟁하며 성공리에 가장 먼저 분양을 마쳤다. 소비자의 편의를 배려한 설계와 시공으로 고객을 만족시킨 것이 큰 이유였다.
건설업은 정부 정책과 가장 큰 영향을 주고받는 분야 중 하나다. 우 회장은 건설업을 하면서 쌓은 경험을 살려 건설분야에 필요한 법과 제도에 기여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지금껏 정계로 진출할 기회가 세 번 정도 있었어요. 정책과 관련된 구상을 실현할 좋은 기회를 잡지 못한 것은 인생을 돌아볼 때 가장 큰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죠. 하지만 깨끗하게 포기하고 정리할 수 있었던 것은
‘사업하는 사람이 정치에 한눈 팔면 안 된다’는 지인들의 충언 덕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1991년 강서갑 지역구 서울시의회 의원, 김영삼 정부 당시 신한국당 중앙상무위원, 이후 환경분과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지역주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힘써왔다.
나눌 때 비로소 행복해진다
평생 건축만 생각하며 살아온 우 회장도 따로 마음을 쓰는 부분이 있다. 독거노인을 위한 나눔 활동을 할 때가 그렇다. 지구당 부위원장을 하며 인연을 맺게 된 강서구는 특히 각별하다. 자신도 어려운 시절을 겪었기에 다른 이들의 어려움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다. 도시 핵가족화를 겪는 노인들이 점차 자리를 잃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우 회장은 세상을 떠난 부모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특히 노인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 이유도 여기에서 비롯한다.
“지금도 부모님을 한 달만 모셔봤으면 하는 생각을 자주 해요. 특히 독거노인분들을 볼 때면 ‘우리 아버지, 어머니도 살아 계셨더라면 저 연세쯤 되셨을 텐데’ 하는 생각이 떠올라 그냥 지나칠 수가 없더라고요.”
지금까지도 매년 설과 추석 같은 명절에는 양로원을 꼭 찾아간다는 우 회장. 기초생활수급자로 지정된 300여 세대에는 매년 쌀을 지원하고 있다.
1984년에는 강서구 화곡동에 처음으로 노인정을 세운 데 이어 1997년까지 서울과 경기도 내 여러 지역을 다니며 노인들의 휴식공간을 만드는 데 앞장섰다.
“사업에서 얻은 이익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거창한 의미보다는 필요로 하는 분들이 있고 나 역시 할 수 있는 여력이 있으니 내가 해드리자는 생각에 봉사를 시작했어요. 스스로 노력해서 남을 도울 수 있다는 기쁨은 상상 이상으로 삶에 활력을 더해주죠. 저 역시 봉사하며 얻는 보람은 누구에게 다 설명하기가 어려워요. 또 누가 알아주든 말든 나와 하늘만 알면 된다는 생각으로 임하니 굳이 내세울 것도 없더군요.”
우경선 회장은 2010년 12월 20일 자신의 회고록인 ‘부지런하라’를 출간했다. “70년의 인생과 40여 년 건설인으로 살아온 삶을 반추하면서 어린 손자들에게 인생의 교훈을 전달하고 싶었다”는 소회를 밝힌 그는 인생의 진정한 행복을 늘 생각하고 찾을 것을 당부했다.
“행복이란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돈에 가치를 둔 사람이라면 돈이 많을 때 행복하겠죠. 하지만 그것이 진정 합당한 가치인가를 생각해보면 누구라도 잘못된 가치임을 알 것이라 생각해요. 자신과 가족에 중심을 두고 맡은 일을 부지런히 하며 나눔에 가치를 둔 사람이라면 혹 많은 돈을 벌지 못하더라도 분명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행복이란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스스로 노력할 때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안정적인 미래는 좋은 습관과 부지런함을 몸에 익히는 데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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